존 르 카레에게 전업 작가로서의 길을 열어주고 명성을 안겨준 대표작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에 이어 읽었다.
이 책이 많은 사랑과 좋은 평판을 받은 이유를 알겠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에 빠져들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 목차 -
1. 줄거리
2. 인간을 위한 체제와 그 체제 안에서 인간의 소외
3. 독서의 즐거움
4. 작가에 대한 이해와 내 기억의 한계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 존 르 카레 / 김석희
1. 줄거리
동독 공산당의 고위 간부가 베를린 장벽을 통과하다 총에 맞아 사망한다. 그는 영국이 동독에 심어 놓은 스파이다. 정확하게는 내부 변절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영국의 동독 첩보 책임자 리머스는 장벽 반대편에서 그 모습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영국의 동독 내 첩보망은 와해되고 책임자인 리머스는 소환되어 한직으로 밀려난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폭력사건으로 교도소까지 가야 했던 그에게 동독 정보기관에서 은밀히 제의가 들어온다.
리머스는 지금껏 동독에 심어둔 내부 스파이를 감독하던 위치에서 이제는 영국의 정보를 동독에게 건네는 스파이가 된다.
이것은 의심을 사지 않고 동독에 리머스를 안전하게 심기 위한 영국의 작전이었다. 작전의 목표는 동독 정보부의 책임자이며 영국의 첩보망을 와해시킨 문트의 제거였다.
리머스는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를 제공하지만 그 정보는 문트가 영국의 위장 첩자임을 드러내게끔 조작되었다. 그리하여 리머스의 정보를 진위를 의심하면서 확인하는 동독 정보 당국은 문트의 배반을 확신하게 된다.
하지만 이면에는 더 깊은 조작의 장치가 있었고, 리머스가 알지 못하는 극소수만 아는 궁극적 목표는 동독 당국의 문트에 대한 의심을 완벽하게 없애는 것이었다. 이번 작전은 오히려 문트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리머스는 자기의 신념과 의지로 결정하고 행동하지만 신념과 의지마저도 작전의 일부였다. 장기판의 철저한 말이었다.
이 사실을 리머스는 깨닫고 문트의 도움 속에 첫 장면처럼 베를린 장벽을 넘어 탈출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 작전의 이면을 알게 된 연인이 버려지고 자신도 죽음을 선택한다.
2. 인간을 위한 체제와 그 체제 안에서 인간의 소외
냉전의 시대가 있었다. 지금은 이 개념이 낯설지만 나에게는 익숙하다. 어린 시절 자라나던 환경이 냉전의 그늘이었다. 공산당은 악마로, 공산 치하에 사는 사람들은 불쌍한 존재로서 구원의 대상이라는 생각이 당시의 진실이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우리 진영이 공산독재체제의 야욕을 분쇄하기 위한 노력에 박수를 보냈다. 그중의 하나가 007 시리즈로 대표되는 스파이 영화였다.
액션, 긴장감, 화려한 과학 기술, 적들을 농락하는 여유, 아름다운 여인 등 온갖 상상력이 전하는 즐거움에 더해 우리가 이겨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자유민주주의라는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체제는 개인의 선택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는다. 반면 정치, 경제 두 영역에 사용되는 개념인 공산주의 체제는 인간의 차별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한다.
두 가지 개념은 트레이드오프의 성격을 지니기에 섣불리 무엇이 좋고 나쁘다고 손을 들어주기 어렵다.
하지만 소수에 의해 체제 유지가 프로파간다로 조작되어 이데올로기가 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서로는 서로에게 인정할 수 없는 박멸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기기 위해 체제의 목적과는 달리 자유민주주의 아래에서 개인의 선택은 철저하게 제약되어 체제의 명령에 따르게 되고,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소수의 명령에 복종을 강요당하는 차별이 더욱 강화된다.
이런 모순적 구조를 이 책은 그리고 있다.
서로 다른 두 체제가 똑같은 모습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보인다. 운영되는 과정에서 개인이 가지는 숭고한 가치는 한낱 어린애의 꿈처럼 의미 없는 것으로 폄하되고 언제든지 폐기된다.
영국 공산당원인 리즈는 올바름과 인간의 가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동독과 영국의 정보 당국의 묵인 아래 베를린 장벽에서 사살된다.
두 체제가 지키려는 가치가 얼마나 허황한 소리인지 보여준다.
소수의 비밀스러운 서클 내에서 이루어지는 결정, 이 결정의 비밀로 인해 실패하더라도 아무런 책임이 없고, 결정의 실행은 철저하게 개인의 선택을 박탈하는 시스템이 인간 사회를 지배한다. 그 시스템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리머스의 결론은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3. 독서의 즐거움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는 추리 소설의 느낌이 강하다.
주인공인 리머스의 눈으로 문트의 제거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작전이 진행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작전은 리머스의 인식을 넘어가 버린다.
독자도 그 과정에서 심한 혼란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데 리머스의 입장이 되어 이유를 알아내려는 노력을 같이 하게 되고 이면의 세계가 파악될 때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4. 작가에 대한 이해와 내 기억의 한계
존 르 카레의 작가 연표를 보고 그의 사주를 뽑아보았다.
한 인간이 자기의 삶에서 스스로 어떤 인간임을 드러내는 시기가 있다. 그 시기에 쓴 작품이 바로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다.
그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나왔다고 말할 수 있다.
생각할 거리와 추리의 즐거움이 모두 있는 좋은 책이다.
미션 임파서블과 같은 액션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영화가 아니라 책이 전할 수 있는 이야기의 강점은 월등하다. 안 읽으신 분들은 읽어보시길 권한다.
분명히 영화로 본 것 같은데 내용을 읽으니 아닌 것 같다. 다른 영화와 착각했나 싶어 007 시리즈를 봐도 부제가 비슷하여 착각을 일으킬 만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북국에서 온 스파이’,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아무튼 너무 익숙한 제목인데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니 놀랍다.
기억은 믿을 것이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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