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만병의 황제의 역사 / 싯다르타 무케르지 / 이한음 / 까치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한 마디가 뭘까?
난 ‘암’이라 생각한다. 자신이나 가까운 사람이 암이라는 말을 하거나 의사로부터 그 말을 들으면 그때부터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그것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무거움으로 다가온다.
자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삶이 통째로 파괴된다.
요즘은 건강검진을 꾸준히 하는 관계로 건강검진에서 암을 조기에 발견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어떤 증상이 있어 치료를 했는데 낫지 않아 큰 병원에 갔더니 암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암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때부터 자기가 자기의 삶에서 주도권을 잃는다.
환자, 병자, 심하면 죽음을 앞둔 사람이 되어 병과 싸우는 삶이 된다. 그리고 그 싸움의 주체는 자기가 아니라 병원이 된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병원에서 권위로 가득한 의료진에게 자기를 맡긴 채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초라한 존재가 되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서 낫기 위하여 복잡한 시스템에 의탁한다.
암이라는 병에 걸린 것이 확인되는 순간부터 하루하루 모든 순간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서 알지도 못하는 암을 낫게 하기 위하여 수동적으로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말없이 따라야 한다.
자기도 사랑하는 가족도 어느 누구도 암의 치료와 관련하여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한 사람의 삶을 사회적으로, 심리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파괴하는 암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의 병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그리고 자기가 병에 대한 결정을 한다. 감기라는 병이 어떤 모습이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다리를 삐었을 때 아프다는 것과 왜 아픈지에 대해 안다. 하지만 암은 그렇지 못하다.
암이라는 병은 너무도 흔하게 들었지만 막상 암을 알지 못한다.
암이란 무엇인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막상 접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암이란 무엇인가?
이 책은 제목처럼 암이라는 질병의 역사를 밝히고 있다.
어찌 보면 질병으로서 암의 역사라는 말은 잘못 쓰였다. 문화나 지질학적 사건처럼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시간적 변화가 있었던 것의 기록이 역사다. 그러나 암은 과거에도 암이었고 지금도 암으로서 달라진 것은 없다. 병리적 현상일 뿐이다. 그런데도 제목이 암의 역사다.
암을 바라보는 인간의 대응에 관한 기록이기에 그렇다.
오래전부터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어떤 증상이 있었는데 뭔가 딱딱한 혹이 생기는 것이었다. 이를 암이라 불렀다.
해부학과 생리학이 발달하면서 겉으로만 파악하던 단계를 넘어 속에서 혹이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치료를 위한 방법으로 혹의 물리적 제거를 시도한다. 혹의 제거로 환자가 치료되어야 하나 그렇지 못하고 광범위한 혹의 제거에 집착한다.
또 화학적 방법으로 혹의 제거를 시도한다. 물리적 제거가 더 광범위한 조직의 제거로 방향을 잡았듯이 화학적 제거는 더 강한 독성의 약물로 세포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승리를 거두기도 하지만 댓가가 크다. 대부분의 경우 댓가만 치르고 패배한다.
방사선이 발견되고, 거기서 우연하게 방사선이 세포에 미치는 효과를 발견한 후 방사선도 암 치료에 동원된다.
역학이 발달함에 따라 예방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단순한 치료의 영역을 벗어나 암이 사회에 끼친 영향과 사회적 움직임이 암을 대하는 태도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도 알 수 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많은 돈이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암의 치료는 요원했다. 암을 치료하기 위해 암을 알아야 했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암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암을 알지 못하고 암을 치료하려 했던 것이 실패의 이유였다.
비로소 암이라는 것을 직시하게 된다.
암을 볼 수 없었던 데에는 과학적 지식의 한계도 있었지만 사회적 영향도 컸다. 느긋하게 기초학문을 지원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암이 왜 그렇게도 치료가 어려운 이유와 암의 속성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이런 기초적 지식을 바탕으로 치료를 위한 새로운 방법들을 발견하고 있다.
암이 죽음과 동의어인 시대는 지나갔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지만 그래도 암에 대한 이해는 놀라울 정도로 늘었다.
저자는 암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의 모색과 이런 방법을 택한 이유와 그런 방법이 나오게 된 배경과 문제의식이라는 광범위한 내용을 알기 쉽게 유기적으로 엮었다. 작가가 아니라 의사가 썼음에도 퓰리처상을 받을 만하다. 뛰어나다.
이 책은 2011년에 출간된 책이어서 현재 상황은 이 책이 예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발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미덕은 치료에 관한 내용을 밝히는데 있지 않다.
암이라는 대상을 파악하기 위한 힘들었고, 한편으로는 무모했고, 엄청난 댓가를 치뤘던 과정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암에 대한 실체를 밝히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 주위에 닥친 암을 막연한 사신(死神)이 아니라 대상으로 대하고 대응할 수 있게 한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암에 대한 인류의 대응을 살펴 본 까닭에 무수히 많은 사람의 행적이 꽤 세밀하게 언급된다.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처럼 많다.
그리고 낯선 용어들도 자주 등장한다. 느긋하게 앉아 술술 읽어나갈 책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은 후에 암이라는 말이 나를 삶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알지 못하는 존재는 아니게 된다.
치료는 거대한 의료시스템에 맡기더라도 대부분 디스크 질환의 치료에서 어떤 지점에 서 있는지 알듯이 암이라는 질환에서도 질병과 치료와 전장인 내 몸과 내 몸의 주체로서 나라는 거대한 좌표를 읽을 수 있다.
자연과학 서적은 지식의 습득이 목적이다. 다양한 해석을 불허하고 감정의 개입이 있을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가끔 자연과학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깊은 울림이 있는 경우가 있다. 에릭 캔델의 회고록 ‘기억을 찾아서’ 이후 많은 감동을 받은 책이다.
빽빽한 글로 채워진 500 페이지가 넘는 책이지만 꼭 읽어보길 권합니다.
번역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는데 이 사람이 번역한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좋은 글을 읽게 해 줘서 감사하다. 그리고 미처 감사한 마음조차 갖지 못한 것에 대해 번역자에게 미안하다.
80년대 대학생일 때에도 까치출판사의 책을 읽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속표지는 투박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항상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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