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포도 / 존 스타인벡 / 김승욱
삶이란 먹는 것이다.
사람은 먹고 거기서 얻은 힘으로 다음에 먹을 것을 구한다. 이 과정을 태어나 죽을 때까지 반복한다. 먹는 순환이 멈추는 순간이 곧 삶이 멈추는 순간이다.
먹는 것을 마련하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사람은 수고롭게 몸을 움직여 겨우 다음 한 끼를 해결한다. 먹는 것을 마련하는 과정, 자기의 몸을 써서 먹을 것을 얻는 행위를 노동이라 한다. 이런 이유로 노동은 삶의 본질이다.
살아가는 것이 노동일 진대 어느 순간 노동과 삶의 연결이 끊어져 버린다. 노동이 먹을거리를 마련하지 못하면서 삶도 삶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
사람은 땅이 베풀어주고 하늘이 길러주는 먹을거리를 노동의 수고로움으로 땀을 대지에 뿌리면서 거둔다. 이 때 사람과 그의 삶은 분리되지 않았다. 노동과 노동의 산물도 분리되지 않았다. 사람과 그를 기르는 노동의 터전도 분리되지 않았다.
농부는 대지와 호흡하며 날씨와 계절에 순응하며 묵묵히 생명을 기른다. 그리고 수확한 곡식으로 하루하루를 먹는다. 삶은 끊임없이 반복한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사람이 대지를 떠나라는 통지를 받는다.
인간의 먹을거리를 기르던 생명이 교감하던 대지는 산업화한 농산물을 생산하는 토지로 바뀌어 이윤이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 숫자의 오르내림에 지배를 받는다. 이윤의 증가가 목적이 되면서 흙을 갈던 말의 거친 숨소리는 트랙터의 기계음으로 바뀌고 농부의 땅은 대량생산의 효율성으로 무장한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에 약탈당한다.
무슨 이유인지 알지 못한 채 매일 몸을 놀려 먹을거리를 장만하던 성실한 사람들은 노동을 박탈당한다. 삶의 터전이던 땅에서 쫓겨난다. 그의 삶은 살아있으되 더 이상 온전한 삶으로서 존재하지 못한다.
대지와 유리된 농부는 프롤레타리아가 되어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절대적인 힘, 자본주의 속으로 녹아들어 간다. 자유경쟁, 시장원리라는 황금률 아래 보호받지 못하는 무산계급의 가치는 수요, 공급의 원칙하에 점점 떨어져만 간다. 이미 삶에서 소외를 받은 사람은 노동의 가치마저도 부정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신기루를 쫓듯 향한 캘리포니아는 결코 약속의 땅이 아니다.
이윤의 기초인 상품 가격의 방어를 위해 옆에 못 먹어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있어도 먹을 것을 썩힐 뿐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헛된 희망에 속아 캘리포니아로 들어온 유리된 사람들은 그 숫자로 인해 서로가 서로에게 경쟁자가 되어 자신의 가치는 떨어지고 하루 종일 일하더라도 오히려 빚을 지는 상황을 맞는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개인의 잘못이 어디 있을까?
개인의 잘못이란 것이 과연 있기나 할까?
‘분노의 포도’는 대공황 시절 토지를 대자본에 빼앗기고 프롤레타리아로 변화한 자영농 가족의 이야기다.
점점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던 시기에 그 흐름에서 탈락한 소박한 한 가족은 결국 남은 몸뚱이로 삶을 견뎌내려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착취의 연속이다.
기업의 이윤 획득과 자본의 축적이 당연시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존경받는 행위가 된 사회에서 이 소설은 이윤의 추구 과정에서 잃는 사람의 고통을 드러낸다.
사회주의적 용어가 하나도 사용되지 않지만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간이 부정당하는 모습이다.
이 소설은 토지를 빼앗긴 자영농 가족의 몰락을 그린다. 살아보려 애쓰지만 그 노력은 가여운 날갯짓에 불과하다는 것이 독자의 눈에 보인다. 그리하여 가슴이 더 아려온다.
하지만 사막처럼 메마른 소설의 흐름에도 오아시스가 나타난다. 바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 연대할 때다.
서로가 서로의 고통을 알기에 그 고통을 나눌 수 있다. 함께 의지하면서 고통을 극복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생산요소의 하나로 남은 노동이지만 노동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노동하는 사람이 삶을 서로 위로함으로써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생산요소로서의 노동이 아니라 사람의 일로써 삶은 이어진다.
어릴 때 읽었던 소설이다.
‘스케일’이라는 책을 보면 사회현상의 특징이 드러난다. 그리고 변화의 속도도 알 수 있는데 상호 접촉의 횟수가 변수다. 상호 접촉의 횟수가 시간이 지날수록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이 때문에 사회의 변화도 급격하다. 이 과정에서 이윤이 창출되므로 그 흐름을 되돌릴 수 없다.
흐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이윤과는 무관한 외부요인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는데 외부요인이 있었다. 판데믹이었다.
상호 접촉이 늘어나는 만큼 판데믹은 더 잦을 것이다.
코로나 이후의 사회는 어떻게 변할까?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경제적으로 고통을 겪는 이 시기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까?
1930년대 대공황의 상황을 보며 지금 시대를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 읽었던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책을 읽을까 말까 오랫동안 망설였다. 글이 아프기 때문이다.
역시 힘들게 읽었다.
참으로 삶은 어렵기만 하다.
사회현상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지 않아도 소설을 통해 그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책들은 두고두고 읽을 만하고 고전의 반열에 오른다.
사람 간의 연대라는 감정에 기반하여 사회적 모순을 담담히 그린 이 글은 이미 고전이 되었다.
소설가에게 사회의 대안을 바라면 안 된다. 하지만 글을 다 읽고 ‘그래서 앞으로 어떡하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역사는 참으로 많은 사람의 고통 속에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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