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요람 / 커트 보니것 / 김송현정 / 문학동네
책의 원제인 Cat’s Cradle은 단어 그대로 번역하면 고양이 요람이지만 실뜨기를 의미한다.
실뜨기(threading)라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양이 요람이라는 다른 말이 생겼다. 손에 걸쳐져 있는 실의 모양과 실뜨기할 때 손의 움직임이 요람처럼 보여서 그런 말이 나왔을 것이다. 대상을 가리키는 밋밋한 지시어에 은유가 더해져 휠씬 풍성한 연상을 일으키는 말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 고양이 요람이 실뜨기라는 말로 굳어지면서 더는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하고 실뜨기의 동의어로서 축소된다. 일상어가 되어버린 고양이 요람에서 고양이 요람이 보인다면 그것은 상상력이 아니라 단어 조합의 학습으로 인한 결과에 불과하다. 단어의 결합이라는 좁은 곳에만 초점을 맞춘 행동이다.
커트 보니것은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좁은 시야만으로 세상을 본 사람을 그린다. 편협함으로 인한 보편성의 상실이 얼마나 큰 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지 밝힌다. 그는 원자폭탄을 만들었던 과학자들에게 묻는다.
수십 만의 사람이 죽는 날 그 살인 무기를 만들었던 사람은 어떤 하루를 보냈는가? 대면하지 않지만 살아 있는 수많은 사람이 엄청난 고통을 당할 때 가해자로서 책임을 부정할 수 없는 사람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가? 과학기술이 가치중립적이라 말할 수 있는가?
커트 보니것은 SF 작가에게 수여하는 휴고상, 네뷸러상 수상작가다. 과학기술과 관련된 소설로 명성을 얻었다. 이 작품도 SF의 탈을 쓰고 있다. 하지만 흔히 만날 수 있는 과학소설과는 흐름을 달리 한다.
대부분의 SF가 현실과 유리된 시공간에서의 이야기이거나 과학기술 그 자체가 소설을 끌어간다.
하지만 이 소설은 작가가 글을 쓰던 당시 현재가 배경이다. 여기에 초기 007 영화처럼 현실에서 조금 벗어난 상황이 전개된다.
핵반응을 연상시키는 높은 온도에서 물을 얼리는 연쇄 반응 물질, 보코논교라는 반기독교적 종교, 샌로렌조라는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작고 무기력한 나라 등이 그것이다.
관찰자의 시선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그리고 글을 쓰는 관찰자는 누가 봐도 커트 보니것 자신이다. 이야기는 작가가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한다.
원자폭탄이 터진 날,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인 날, 너희는 뭐 했니?
원자폭탄으로 대치되었지만 드레스덴 폭격으로 인한 대살육을 체험한 후 그것을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 질문이다.
한 분야로는 지식이 많을지라도 시야가 극도로 좁은 과학자, 그 과학자를 둘러싸고 있는 국가안보라는 명제가 만든 시스템을 묘사한다. 일상이지만 작가의 필터에 걸려 드러난 모습들은 우스꽝스럽고 어색하다. 마치 흑백 무성영화 시대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인류사에서 가장 큰 학살에 책임이 있는 과학자는 천수를 누린다. 아이러니다. 그가 가족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통 사람처럼 건넨 말이 고양이 요람이다. 그러나 단어에 매몰된 자의 모습이 더욱 부각될 뿐이다. 아이의 입을 빌려 역겹고 더러운 존재로 단정된다.
한편의 코미디는 가상의 국가 샌로렌조에서도 이어진다. 이 나라의 통치 이데올로기는 친미와 기독교다. 낯익다. 가끔 공포의 주입도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강요하는 사람, 지배받는 사람 모두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세상은 굴러간다. 터무니없이 굴러간다. 그 굴러감의 끝은 어디일까? 이 코미디의 끝은 어떤 모습일까? 파국을 기대하며 읽으며 뒤로 갈수록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진다. 잘 쓴 글을 읽을 때 몰입도가 높아지며 나타나는 모습이다.
비틀어 놓은 상황들이 어긋나지 않는다. 그리고 몇 페이지 씩 짧게 소제목으로 글을 나눠 읽기에 좋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난 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좀 당황스럽다. 작가가 모든 것을 비틀어 놓은 현실이 살고 있는 현실과 괴리가 커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또 미국식 블랙 유머도 낯설다. 그래서인지 읽었으나 인상도 내용도 의미도 모호하다.
보코논교에서 두 발을 맞대는 행위가 있다. 보코 마루라 하는데 신체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발바닥을 맞대어 서로 교감한다. 가장 존중하는 의식이라 하는데 그럴듯하다. 그리고 어릴 때 할머니께서 발바닥을 맞대면 싸운다며 금기시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커트 보니것은 독일의 부유한 가문 출신이다. 투자 이민 형식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여 어릴 때부터 부유한 생활을 했다. 그래서인지 자기 핏줄에 자긍심이 깔려 있는 것 같다. 드레스덴 폭격은 인류의 참사로 표현되지만 자기의 뿌리인 독일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으로 비쳐 그토록 천착하는 것 같다.
그의 사고는 반전과 인류애로 평가받으나 과연 승화되었는지 의문이다. 당시엔 그렇게 하면 돈이 되었기 때문에 그 흐름을 잘 탄 것은 아닌가 의심도 든다.
그의 글은 뭔가 불편함이 있기에 괜히 작가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 어쩌면 이것이 작가의 의도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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